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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름 展

전시장소 갤러리 우덕 전시기간 2010년 7월23일 ~ 2010년 8월 6일 전시작가
  • 가장 멀리 있는 나 130.3x162.1cm 장지에 채색. 2010
    작품설명
    가장 멀리 있는 나 130.3x162.1cm 장지에 채색. 2010
  • 가장 멀리 있는 나 72.7x90.9cm  장지에 채색 2010
    작품설명
    가장 멀리 있는 나 72.7x90.9cm 장지에 채색 2010
커피향기에 실려 온 기억, 추억, 그리고 환영

가장 멀리 있는 나. 이보름이 자신의 근작에 붙인 주제다. 가장 멀리 있는 나? 타자들은 가까운데 정작, 유독 나 자신만큼은 멀게만 느껴진다는 말인가, 아니면 나를 형성시켜준 주체의 레이어 중 가장 멀리 있는, 가장 뒤쪽에 있는, 가장 과거에 속한, 무의식의 층위 속에 꼭꼭 숨겨진 나를 의미하는가? 아마도 어느 정도는 이 모두를 의미할 것이다.
적어도 주제만 놓고 본다면, 그 이면에는 자기를 낯설어하는 자기소외 내지는 자기 존재에 대한 무지가 내장돼 있다. 존재에 대한 무지? 일관되게 일상성(주체가 생성되는 자리)을 심화시켜온 작가의 자의식을 생각하면 의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맞다. 주체에 대한 의문은 그것이 물음의 형식을 취하는 것인 만큼 얼핏 인식론의 대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존재론에 속한다. 그리고 존재론은 느낌의 강밀도에 속하는 것인 만큼 공유할 수는 있어도 공감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느낌이 사사로운 것일 때는 더욱이 그렇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마치 까고 또 까도 알맹이가 없는 양파껍질 까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그 과정을 낱낱이 수행한 연후에도 여지없이 공, 허, 무에 이르고, 어쩌면 또 다른 원점일지도 모를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지겨운 반복과 유쾌한, 그리고 기꺼운 실패). 이런, 존재의 무지에는 무엇보다도 존재에 대해 섣불리 이름 붙이려는 유혹을 유보하는 미덕이 있다.
이 존재론(자기소외 내지는 존재에 대한 무지로 나타난 자의식)에 또 다른 존재론이 포개진다. 이중적이고 다중적이고 중층적인 자의식에 연유한 존재론이다. 나는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그리고 필연을 가장한 우연한 타자들의 집합으로 구조화돼 있다. 즉 나는 타자들이 나의 전망 속에서 발견한 것들, 그리고 그들이 재차 나에게 되돌려준 것들로 구조화돼 있다. 여기서 나는 의식적인 나와 무의식적인 나, 사회적인(혹은 제도적인) 주체와 존재론적인 주체로 분열된다(분열은 필연이며 운명이다). 그리고 나는 의식적인 나와 사회적인 주체를 타자에게 내어주고, 무의식적인 나와 존재론적 주체를 숨긴다(억압된 무의식). 나는 소위 타자들의 영역과 나의 범주로 축조돼 있는 것이다. 나의 범주? 진아의 범주? 여기서 진정한 나의 범주는 무의식에, 그리고 존재론적 층위에 속한다. (라캉에 의하면) 나는 의식을 통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무의식을 통해서도 말한다. 해서, 나는 언제나 실제로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하며, 때로 그 말 속에 내가 들어있지 않을 때도 있다. (어쩌면 진정으로 나에게 속한, 내가 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를) 바로 무의식이 말을 하며, 몸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충분히 사려 깊지 못한다면, 그리고 건성으로 대한다면 그 말 즉 몸말은 결코 너에게 가닿지 못할 것이다(어쩌면 존재론에 관한한, 불통은 피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가장 멀리 있는 나, 란 주제는 이처럼 그 이면에 자기소외와 존재에의 무지를, 그리고 타자를 경유한 자아(너의 전망에 포착된 나)와 함께 특히 무의식적 자아(때론, 자신에게조차 은폐된, 그리고 곧잘 자신을 속이기조차 하는 나)에 연동된 존재론적 자의식을 내장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의 그림은 이 자의식에 상징과 암시의 옷을 덧입힌 것인지도 모른다. 해서, 어느 정도 작가 자신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나, 자아, 주체, 에고로 나타난 존재 일반의 문제의식을 획득한다.

이보름의 그림은 의식적인 층위와 무의식적인 층위, 객관적인 기호와 주관적인 기호, 가시적인 영역과 비가시적인 범주가 씨실과 날실처럼 긴밀하게 직조돼 있다. 대개는 일상적인 생활공간으로부터, 사사로운 경험의 전망으로부터 추슬러진 그림들은, 그러므로 자화상의 일종이랄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림 어디에도 작가 자신을 직접 드러내는 단서는 없다. 나아가 사람 형태 자체가 애매하고 암시적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최소한의 실루엣이나 가장자리 선으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로, 밋밋한 평면으로 축약 표현돼 있고, 그 나마 하나같이 얼굴이 잘려져 있거나 지워져 있다. 그 와중에서도 그 혹은 그녀만큼은 암시받을 수 있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 혹은 그녀는 특정의 그 혹은 그녀라기보다는 보통의 그 혹은 그녀로 나타난 전형적이고 익명적인 주체들이다. 다름 아닌 작가-주체를 형성시켜준 타자들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익명성의 가면(페르소나) 뒤에 숨은 현대인의 보편 초상이기도 하다.
그 초상들이 일련의 서사를 풀어놓는다. 그 혹은 그녀가 한 아름 꽃다발을 들고 방문한 날, 그 혹은 그녀는 꽃처럼 화사했다.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를 뒤로 한 채 한 사내가 어둠 속으로 먹물처럼 스며들고 있다. 그리고 어딘가로 황망히 멀어져가는 남자. 혹은 길모퉁이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 비록 그가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그가 지금 자기생각에 혹은 자기연민에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혹은 그녀에게서 걸려온 전화. 혹은 전화를 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 둘지,로 번민하는 나. 의자 곁에서 서성이는 나. 혹은 아직도, 여전히 그의 체온을 간직하고 있는 의자. 실루엣 속에 잠겨 있는 여자와 그 여자의 발끝에서 시작된, 해서, 그 여자에게 속해져 있는,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남자. 실루엣으로 화한 여자와 그림자로 축약된 남자.
실루엣과 그림자는 실제가 아니다. 실제가 남긴, 실제를 기억으로 더듬는 과정에서 나와진 흔적이며, 자국이며, 여운이며, 향기다. 때론 빛보다 어둠이, 실제보다 흔적이 더 많은 말을 할 때가 있다. 아니, 더 많은 말을 한다. 어둠이 말을 삼키고, 흔적이 의미를 숨기기 때문이다(침묵이 말의, 의미의 자궁이며 모태다). 어쩌면 결정적인 말이나 드러난 의미는 기껏해야 가치중립적이고 무미건조한 정보로 화한, 말의, 의미의 화석이며 박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명은 바로 이처럼 말과 의미를 화석화하는 과정을 진행시켜온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예술의 소명이 있다. 말과 의미를 한정하고, 결정화하고, 화석화하려는 문명의 기획으로부터 말과 의미를 구제하고, 그 처음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지시하는 언어로부터 암시하는 언어를 구제하는 것, 한정적인 의미로부터 포괄적인 의미를 복원하는 것, 하나의 말과 하나의 의미로부터 다른 말과 다른 의미를 불러오고, 접붙이고, 부풀리는 것, 언어를 사용한다기보다는 언어를 유희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정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능한, 비결정적인, 열려진 채로 언어를 방기하면서 작동시키는 것인데,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계기가 여백이며, 암시다. 주지하다시피 여백은 비움으로써 채움을 암시하는 방법이며, 그리지 않으면서 이미지를 암시하는 방법이다. 이때 비움을 채움으로 인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며, 이는 작가의 전망과 관객들 저마다의 전망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이처럼 여백은 그 의미화의 과정에 관객을 초대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그림의 지평마저 확장된다.
작가의 그림에서 여백은 이처럼 공간적 개념으로 현상하고, 의미론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실루엣과 그림자로 나타난 암시적인 형태 역시, 형태 속에 일종의 여백을 조성한 것이란 점에서, 일정하게는 이런 여백의 형성원리에 속한다. 그리고 여백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흔적, 자국, 여운, 향기와 같은, 부재하는 것들을 암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굳이 보지 않아도 보이는 번민, 꽃에서 맡아지는 그의 향기, 그 꽃이 떠올려주는 바램과 설렘, 의자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체취와 온기, 상념과 서성거림, 커피 향기에 실려 온 기억의 한 자락 같은 것이다. 프루스트의 주인공으로 하여금 유년시절로 데려다준 마들렌 과자의 맛과 향 같은 것, 주체로 하여금 추억 속으로 데려다 주고, 기억을 곱십게 만드는 어떤 계기 같은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그림에는 마치 조각에서 흙이 더 잘 붙게 하기 위해 만든 틀 같은, 격자 형태의 망 구조가 등장한다. 어쩌면 애매하고 암시적인, 섬세하고 약한 의미들이 더 잘 들러붙게 하기 위해 만든, 의미론적 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틀은 작가와 타자가 긴밀하게 직조된 관계의 망 같은 것이며, 작가의 삶의 전망 속에 들어와진 타자와 함께 만든 인연의 망 같은 것이다. 그리고 특히 작가가 세계를 보는 프리즘 같은(실제로 옛날에 화가들이 풍경을 볼 때 사용한 도구와도 같은) 것이다. 작가는 이 프리즘을 통해서 세계를 본다. 닫히면서 열린, 막히면서 통하는, 단절하면서 연속적인, 숨기면서 드러내는(그리고 드러나는) 세계의, 일상의 이중성을, 다층적인 구조를, 그 역동적인 생성원리를 본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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