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전시· 사업 회원전시

회원전시

유희승 ‘올해의 작가상’ 수상 초대전

전시장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관 전시기간 2023년 11월15일 ~ 2023년11월20일 전시작가 유희승

18회 광화문국제아트페스티벌/광화문아트포럼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상수상 초대전

 

일시 : 2023. 11. 15() - 11. 20()

장소 :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

주소 : 서울 종로 세종대로 175

 

관람시간 am. 1030~pm. 19

02-399-1114

 

 

유희승 (010-9669-3145)

 

유 희승 YU, HEE-SEUNG

 

학력 동덕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회화전공)박사

개인전 25(1989-2020)-예술의 전당, COEX, 라메르 갤러리 초대 동덕여대 박물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1)

부스 개인전 7(2002-2019)

2019 화랑미술제 (COEX 전시장), KIAF, 2020 한국화진흥회 국내 순회전 (서울, 마산, 여수, 청주)

2021 KIAF SEOUL, 2022 화랑미술제, KIAF SEOUL 이 외 국내외 기타 단체전 280여회 참가

아트페어(2009-2019) Shanghai, San Fransisco, Art International Zurich, Contemporary Art Ruhr, Miami Art Fair, ASIA HOTEL ART FAIR HONGKONG 2013, 브루나이 아트페스트, 시애틀, 텍사스

수상 2023 올해의 작가상 (광화문국제아트페스티벌/광화문아트포럼)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2회 및 입선 다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작품집 발간 1986-2023 유희승의 삶 수묵그림이야기 (미술과 비평)

심사 장애인미술대전, 구상전, 나혜석 미술대전

소장처 서울시립미술관, 수원고운미술관, 향암미술관, 동덕여대 박물관, 인천지방법원 외 개인소장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겸임교수, 경희대학교 미술학부, 강남대학교, 우석대학교 동양화과 강사 역임. 한국화여성작가회 부회장, 한국화진흥회 이사, 목화전, 원전, AAA, 동서미술문화학회, 너섬회 회원

 

 

H.P 010-9669-3145

Email hsy32740@naver.com

 

 

수묵, 그 오래된 미래에 대하여

 

일상에서 '무엇이 참 한결같다'는 말은 좋은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오랫동안 모든 것이, 모든 일이 꾸준히 현재까지 연속된다는 뜻이다. 연속된다는 것은 전통이 되며 변수가 없는 상수가 된다. 그렇게 전통은 상수에 속했다. 그러나 예컨대 그것은 구름 없는 하늘이다. 구름과 같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변수가 많은 것은 상수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 존재 그 자체는 상수로 여겨졌지만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하여 보기에 따라 현재의 실존적 삶은 변수의 연속이다. 까닭에 전통은 현재라는 실존적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이니 이 역시 상수는 아니다. 그렇다면 이율배반적으로 변수의 연속이, 연속되니 상수인가. 아니 필멸, 즉 죽음만이 상수다. 그래서 작금에 예술의 종말이나 작가의 죽음을 공공연히 부르짖지 않는가. 그럼에도 전통이라는 말의 무게가 예술가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른바 현대회화를 지향하는 작가들이 공통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 중에 하나는 소위 전통이라는 고전적인 심미체계를 어떻게 수렴할 것인가 하는 점이고, 새로운 조형 방법론을 여하히 거기에 접목시키냐 하는 점이다. 특히 한국화에서는 더욱 그렇다. 여전히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별도 그렇고, 심미체계의 상이점은 물론이고 제작체계와 질료의 문제 등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렇다. 물론 평면회화에서 서양화는 캔버스의 흰 화면을 채워 나가는 방법론이고 한국화는 한지의 하얀 화면을 비우는 방법론이다(흥미롭게도 수묵화의 영어 번역은 Ink Wash Painting이다. 먹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먹으로 씻어내는 그림이다). 흰 화면을 비운다니 이게 웬 망발인가 싶지만 동양사상과 전통 화론을 근거로 하자면 그리 낯설지 않은 논리이다. 마음을 비우고 일체의 경지에서 온갖 것을 잊음으로써 허()의 상태에서 도()와 일체가 되라는 심제좌망이 그렇고, 여백이 그러하다. 허란 바로 비움이 아닌가. 작가 유희승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반응과 선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수묵을 기저로 한 형사와 신사의 함축적인 조형세계와 여백의 과감한 운용을 통하여 전통적인 심미체계를 수렴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그가 전통에서 비롯된 일종의 관성적인 표현에 머문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재적 회화에 대한 고뇌는 전통의 해석과 함께 오롯이 화면에 묻어 있다.

 

유희승은 그림의 소재에 제약을 두는 편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주로 전통적인 소재인 인물과 화훼를 그리고 있다.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그의 인물과 화훼는 그럼에도 서로 맥락이 통한다. 화훼화는 인물에서의 주제의식과 형식논리를 심화 발전시킨 것인데, 특히 제작 형식 면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인물과 화훼를 관통하는 형식 논리는 무엇인가. 바로 몽타주 형식을 통한 전통과 현대의 간극과 사이, 그리고 우리 세계에 대한 응시가 그것이다. 서로 다른 차원의 화면을 이어 붙여 그 간극과 사이를 추적하는 것이다. 그 간극과 사이는 무엇에 대한 추적인가? 응시란 또 무엇인가? 전통을 계승의 대상이며 닫힘의 대상으로 여기는 순간, 현대를 새로움의 창출로 보는 순간 바로 자기모순에 빠진다. 예술의 역사적 흐름에서 일어난 일을, 그것도 미술의 존재보다 더 이전으로 소급되고 수 천년 지속된 아득한 일을 계승을 매개로 어떻게 현재로 호출할 수 있는가. 그 의미론적인 스펙트럼을 확장시켜 보면 소통을 위한 언어의 시원인 몸짓이, 그림의 시원인 질료가, 형태의 시원인 점선면이, 즉 엄밀하게 말해 코스모스가 유래한 카오스가 그것에 해당한다그러므로 전통에 관한 한 계승이 아닌, 작가의 의식과 해석을 매개로 삼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몽타주 방법론의 의식은 사실상 간극과 사이의 형식을 보듬어 전통을 현재로 불러오는 행위일 수도 있고, 나아가 호출된 또 다른 전통의 인식과 만나는 경험일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작품이 거듭나는 창발일 수도 있다. 유희승의 세계에 대한 응시는 단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보는 것은 네가 보는 것이 아니다이자, 장자의 호접몽에서의 나비와 장자의 관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방법론이 아닐까 싶다, 아니 어쩌면 소극적으로 우회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 역시 서양과 동양, 시간과 공간, 주체와 객체, 전통과 현대라는 시공간의 그물망에 포획되고 만다. 그리고 간파하듯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공간의 인식은 너무 불완전하기에 그것에 대한 정의도 불완전 할 수 밖에 없다(현대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나아가 작가의 죽음이 의미하듯 완전한 작품도 예술도 없으므로 전통에 관한 한, 그 계승에 관한 한 감성적 질료로 기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불완전한 언어로 겨우 묘사될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은 불완전한 질료와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기술하는 방법론이다. 그러므로 전통을 더듬어 현대성을 되살리는 작가의 의도는 계승과는 별도로 예술의 본성을 관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 형식, 즉 몽타주를 매개로 전통과 현대성의 본질도 같이 엮어보는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삶의 모습들'에 대한 유희승의 회화적 시선은 논리적, 합리적, 체계적이 아닌 그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회화적 언어가 비언어를 표상하기에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은 유희승 회화의 몽타주 형식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용필과 용묵의 조화를 선언한 작가 초창기 시절부터 그 방식은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우선 의외로 철로를 소재로 한 <()>은 수 많은 철로가 무질서하게 겹쳐져 있어 몽타주 기법의 징후를 풍기고 있었다. 연이어 <응시-해탈>, <화음-()>, <응시-()>, <내 마음의 꽃-‘또 다른 꿈’> 등의 병합된 명제와 <()>, <삐에로 삶의 표정>  <삐에로-삶의 모습들> 등에서 보여지는 시간의 연속을 통해 공간을 확장하는 방식, 화면을 의도적으로 분할하여 사실과 추상이 결합된 화면, 나아가 <삐에로02-화려한 외출>에서 나타나는 의도된 우연한 만남, 직관으로 그려진 연속된 인체 드로잉, 좁고 기다란 화면을 연속적으로 결합하면서도 승무를 추는 인체를 부분 대상화하고 인물의 사실성과 먹의 농담으로 이뤄진 추상성을 단속적으로 배치한 <응시-해탈>, <내 마음의 꽃> 시리즈에서 보여지는 과감한 형상의 분절 등, 이 모든 것이 몽타주의 단서로 여겨진다.

문득 이 단서는 마치 하이데거가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로 규정하고 비판함으로써 망각으로부터 존재를 부활시키려 했던 일련의 철학적 성과에 대한 작가 유희승 식의 파라독사(para-doxa)적 반향처럼 보인다. 하이데거는 서구 철학에서 '존재(유희승의 경우 전통)'가 너무나 자명한 개념으로 간주되어 왔기에 '존재자 지향적 사유'를 진행해오면서도 '존재' 자체에 대한 사유는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그에게 있어 인류에게 그 동안 망각되어 온 본질이 존재 자체라고 한다면, 반면에 유희승의 몽타주 기법은 산수화의 삼원법과 책거리의 시점을 고려하여 우리 회화의 전통적 기법이라는 것을 되살리면서 전통을 새롭게 일깨운다. 흥미로운 것은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열기를 지속하는 세계와 닫기를 지속하는 대지사이에서의 투쟁을 예술작품의 ''을 통해 이야기하듯이 유희승의 회화에서도 전통과 현대, 드러냄과 은폐의 연속을 상대적인 것들의 경계 혹은 접점의 사이 공간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희승의 몽타주 기법의 시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헤겔의 즉자/대자와 같은 구분을 거부하며, 또한 그 양자의 총합이라는 것에서도 해결책을 구하지 않는, 그 둘 사이 내지는 접점에서 유한한, 말하자면 미완성되고 불안정한 총합 속에서 포착하는 것이다. 그런 유한하고 불안정한 총합, 사물과 의식 또는 자연과 의식, 전통과 현대 또는 상수와 변수 사이의 총합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다면 과거 없는 현재가, 현재 없는 미래가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거에도 현재를 살았으며, 현재도 현재를 살고 있고, 미래에도 현재를 살뿐이다. 타임머신이 있다 한들 거기서도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므로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늘 현재만 존재할 뿐이다. 현재란 사실 과거와 미래라는 관념 사이의 미완성되고 불안정한 또 다른 사이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늘 상수로 여겨졌던 전통이라고 하는 것도 늘 미완성되고 불안정한 현대라는 변수의 연속일 것이다. 이른바 전통이란 것도 결국 현재의 연속일 뿐이다. 고개지도, 소식도, 겸제도, 유희승도 사이의 연속이다. 전술했듯이 예술 또한 불완전한 질료와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기술하는 방법론이다. 하여 완전한 작품도, 완벽한 전통도 없는 것이 된다전통은 대체로 건축학적인(그러나 그 자체로는 어떤 개념으로의 환원으로 나아가지는 않는) 구성으로, 각기 독립적이면서 긴밀히 연결되고 중복되며, 포함하고 초월하는 유기체적인 구성으로 나타난다고 기술되지만, 전통의 모든 것이 모호하고 불확실하다는 것, 가능성을 따질 수는 있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부터가, 누구부터가, 어떤 방법론부터 인지가 불확실하다. 전통은 지극히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라 여겨지지만 자칫 그것이 불변의 속성인 듯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고실상은 주관적이고 모호한 오독의 개념이다. 게다가 현재가 소거된 전통은 불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희승은 전통적 방식으로 현대적 인물상과 화훼화를 그린다고 하지만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현상학적 의미론을 작품에 개입시킨다. 일종의 전통 비틀기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동양화의 여백은 기의 표현, 거리의 표현, 생략의 표현이라 논의 되어 왔다. 하지만 유희승의 경우 여백은 이를 넘어서서 상상의 공간, 전략의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추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전략적 공간은 형상의 생략이 아닌, 즉 홍운탁월(烘雲拓月)식의 무의 실체화가 아닌 작가의 의도를 내포한 도발적 의미를 가진 허라는 말이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듯이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채 그냥 놔두는 경우이지만 그 의미는 의외로 심상치 않다. 특히 <묵상-삐에로 삶의 모습> 연작에서 보듯 어느 정도 세세하게 묘사된 삐에로의 상체와 채색된 부분과 대비되어 하부의 여백은 생략을 넘어 적극적으로 은폐를 주장하는 듯하다. “적극적인 현대 여성과 달리 숨겨진 현대인의 복잡성이나 이중성을 고요히 응시하고, “흑백에서 오히려 사유를 더 집중시키고 극대화할 수 있다고 작가가 진술하면서도 화려한 채색의 꽃이 불현듯 수묵을 공격하듯이 출몰하니, 다분히 이중적이다. 일종의 텅 빈 충만함에 꽃을 헌정하는 모양새이다.

 

이런 작업 방식은 작가가 겪고 있는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창발 개념의 혼란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수묵에 대한 풍부한 감수성과 독특한 해석 능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섬세하고 감각적인 필선들과 분방한 발묵을 통한 형상의 구축, 과감한 분절과 몽타주 기법의 혼용은 전통과 현대에 대한 작가의 치열한 의식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그러하기에 작가 유희승에게 수묵의 전통은 과거의 본받을 유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로 간주되고 있다.

 

    ( 미술 평론 )

                                                        

 

 

 b84b877742debc469173faac1cd24958_1699920 

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