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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1 4월 23일 한국화여성작가회 정기전을 위한 세미나 원고
작성자 우먼아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1-04-25 22:21    조회 2,87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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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수. 풍. 정.

    조은정(미술평론가)

    자연의 진실

    형호는 <필법기(筆法記)>에서 노인을 만나 문답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회화관을 드러내었다.

    내가 말하였다.
    “그림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형태를 귀하게 하여 진(眞)을 얻으면 어찌 이것을 나쁘다 하겠습니까?”

    노인이 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림이란 그리는 것이다. 물상을 헤아려보고 그 진(眞)을 얻는 것이다. 물질의 아름다움에서 그 아름다움을 취하는 것이고 물질의 실(實)에서 그 실을 취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질이 된다고 고집해서는 않된다. 만약 술(術)을 모르면 그럴듯한 형태는 가하나 진을 도모할 수는 없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형태고 무엇이 진입니까?”

    노인은 대답했다.

    “형태라는 것은 그 형(形)을 얻어 그 기(氣)를 남기는 것이요, 진(眞)이라는 것은 기질이 모두 왕성한 것이다. 모든 기는 아름다움을 술하고 형상을 남기는 것이며 상은 죽는 것이다.”

    그는 그림을 내형과 외형으로 나누고, 회화는 물상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되 외형이 아닌 물상에 내재한 진실을 나타내는 행위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결국 모든 그림에는 진실이 존재하며 그 원천은 생명력이다. 그에 따르면 회화의 목적이 형태에 내재한 진실의 표현에 있기에 외형의 아름다움만을 취하는 것은 결국 그림이 아닌 것이 된다.

    모든 물상의 총체는 자연이기에 산수화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헌데 형식으로서는 자연의 외관이지만, 진실은 파악되는 것이므로 실상 그 내용은 그리는 이의 사상과 경험이 총체되어 투사된 심상의 표상이다. 고려시대 목판화에서 인간 거주공간의 일부로 나타나던 산과 계곡이 있는 자연은 산수라는 주제로서 독립하게 되었다. 일상의 공간이 아닌 자연의 상징이자 관념의 표상이 된 산수에서는 시대의 기운과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이데올로기가 표상되어 있다. 자연에 비추어 미흡한 존재인 인간이 강조됨으로써, 무와 공의 개념이 강조된 그 공간에 인간의 관념은 거주하고 그래서 현실은 조종되었다. 산수화가 사대부가 지닌 세계관의 반영이 됨으로써 단순한 자연이란 본령에 더하여 정치색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와 유사한 외형을 띠는 서양화의 풍경화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숲을 돌아드는 길목에 존재하는 돌로 만든 정교한 다리와 웅장한 성채, 넓은 들판은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 혹은 국가 권력의 상징이다.

    그림으로서 산수화에서는 자연이라는 표면의 이면에 당대의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 비록 몸은 시정에서 정치를 하고 있지만, 마음은 산 속에 들어가 동자 하나 데리고 은일하며 도를 닦는 것이 이상이라는 이념의 표현으로서 산수화가 사용되었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여 자연의 위대함을 읊조리게 하는 산수는 속세를 떠난 세계관의 반영으로서 은일(隱逸)을 포용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의 공간으로 화하였다. 노장사상과 더불어 자연에 머무는 은일사상은 선비, 관직에 나간 사대부가 산수화를 애호하면서 정치적으로 도구화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박물관에 걸린 수많은 그림 속에서 여성이 제작한 것이 확실한 산수화를 만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상으로서 자연, 이데올로기의 공간은 여성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자연에서 산수로

    르페브르에 의하면 공간은 삶의 조건과 체험의 장으로서 사회적 산물이다. 물론 그는 자본주의 시대 이후 도시문제를 고찰하기 위한 방안으로 공간의 사회성에 주목하였지만, 경험으로서 공간이 실천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양상은 이데올로기의 구현체로서 공간을 규정할 수 있게 하는 논거를 제시한다.

    이상적 공간인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만하임에 의해 적절히 설명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 둘은 존재와 불일치되는 즉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존재초월적 표상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런데 유토피아는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여 새로운 이상을 현실에 실현시킬 가능성이 있는 개념이다. 유토피아는 현실을 초월하여 나아가는 동력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반면 그는 이데올로기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기존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때문에 유기적인 변혁이 따르지 않으면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와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비판하는 유토피아의 순환과정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완벽한 이상향인 유토피아는 고대 아르카디아의 모습을 띤다. 산수화는 근본적으로 선경(仙境)에 기초한다. 배를 타고 도달하게 되는 장소로서 유토피아 혹은 이상향은 고대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여전히 존재하는 공간이다. 상이한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는 지점에 있는 존재로서, 이데올로기의 현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정반합에 이르는 완벽한 지점이자 푸코에 의하면 부유함으로서만 이를 수 있는 그 어느 위치에도 속하지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바로 그러한 이상향이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주체성의 문제를 동반한다. 푸생은 자연의 풍경과 이상향을 조합시켜 죽음과 삶이 넘나드는 공간을 표상한다. 한편 현세적인 쾌락을 예찬하는 와토의 아르카디아는 완벽한 사랑이 도달하는 연인들의 장소로서 나타난다. 동양화의 선경, 이상향은 위대한 자연에 인간을 포함시키는 기제로서 신선 혹은 방문자를 동반한다. 헌데 그곳에 일상인으로서의 여인은 없다. 마고할미 같은 신선이 머무는 곳으로서 도석화에서는 선경이 존재하지만 ‘산수화’라고 볼 수는 없다. 산수화의 세계에 머물고 노니는 이들이 제공됨으로써 산수화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가상의 유토피아가 접합되는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그리하여 여성에게는 실현가능한 공간으로서 유토피아도 이데올로기서도 산수화의 세계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경험의 실천장으로서 공간에 근거하여 볼 때, 근대 인상주의 여성화가들조차 자신이 거주하는 집안의 뜨락과 아이들이 오가는 실내 오페라극장의 객석 그리고 기껏해야 경마장이나 파리교외를 그렸던 것은 그들의 경험이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드러낸다. 경험으로서 자연인 풍경이 몸의 기록을 제한하였음을 알리는 것처럼 동양의 이상으로서 자연인 산수는 사유를 용납하지 않았던 세계였음을 알려준다.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자연은 사회적인 세상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임을 의미한다. 많은 화제 중 산수화가 그들의 세계가 아니었다는 예를 통해 그들 여성의 공간과 사유가 제약받았음이 증명된다. 그런데 기록을 통해 우리는 7세 여아였던 사임당 신씨가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하다’는 사실을 만난다. 율곡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기록한 <선비행장>에서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 사임당은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 낼 사람이 없다 하였으며 그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고도 전언하고 있다.

    안견의 그림을 모사하며 산수화를 익혔다던 사임당의 일화는 존재하나 작품으로 만나본 적은 없다.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만

    자나 깨나 꿈 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가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 모래톱에 흐트락 모이락

    고깃배는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까.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사친(思親)>에는 그가 고향의 자연풍광을 경험하였고 마음 속으로 그려낼 줄 알았음이 드러난다. 그의 시에는 자연의 의미와 경험이 존재하는 것이다. 글로 그려낸 풍광과 정서가 그림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애초에 그가 자연의 세계로서 산수화를 그리지 않았거나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그가 산수화를 그리지 않았다면 여성에게 용납되지 않는 세계여서였을 것이고, 그렸는데 우리가 모른다면 여성이 그린 산수화를 인정하지 않는 세계였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자미상의 산수화가 그녀 혹은 사임당처럼 이름마저 남기지 못한 여성작가들이 그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용납되지 않는 세계관 그러나 존재하는 세계, 그것이 바로 오늘날 여성작가들이 눈여겨보는 산수화의 정체일 것이다. 남성의 세계에서는 일상인 산수가 여성에게는 용납되지 않던 성역이었다. 그곳은 사랑채였으며, 과거시험장과 같은 공적인 공간이었다. 자연의 모습을 한 정치적 공간이기에 여성의 입장이 불가한 장소였던 것이다.

    오늘날 화제로서의 산수는 현실을 인지하는 한 통로로 작용한다. 자연의 대명사이자 인간 삶의 공간을 의미하며 비가시적인 사유의 장소인 산수는 감정을 담을 수 있는 소재이자 주제로 위치한다. 이제 산수화는 여성작가들이 집단적으로 집중하여 분석하고 조명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자연에 대한 관찰로서 산수화는 광활한 자연의 법칙을 조명하는 여성적 시각에서 해석된다. 자아에 대한 인식의 장소로서, 경험의 기록이 발생한 사건으로서 그리고 무구한 흐름의 상징인 시간으로서 산수에 투영된 삶과 경험 그리고 사유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닌 경험의 장소로서 자연은 산수화가 제약한 여성적 공간을 확대시킬 수 있는 여지를 보인다.

    에코토피아와 일상

    어니스트 칼렌버그는 1975년 <에코토피아 리포트>를 발간하며 생태계를 의미하는 ecology와 지역, 혹은 장소를 의미하는 topia를 합성하여 새로운 이상향으로서 에코토피아(Ecotopia)라는 개념을 유포시켰다. 에코토피아는 인간에 의해 규정되고 정비된 자연으로서 아르카디아가 아닌 자연계 전체 즉 생태계가 상호 조화롭게 존재하는, 생태가 주체가 된 개념이다. 이러한 생각 아래서는 인간도 생태계의 일부로 자리한다. 대자연의 법칙에 의해 조율되는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성찰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 순응하는 삶이라는 행동을 요구하며, 실천은 개입을 낳는다. 정치적 이상향에서부터 생존적 이상향에의 돌입은 개체의 존속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여성의 참여가능성이 열린 공간인 것이다.

    생태를 중심에 둔 공간은 사회적 공간에는 없는 지점이지만, 사회적 틀이 거세된 지역에 공존하는 공간이다. 실천의 장으로서 공간의 표상인 에코토피아는 이데올로기로서 여성에게 부재하였던 이상향을 실존케 하는 자원으로 자리한다. 생명성, 생태계의 일부로서의 순환성이란 점에서 에코토피아는 산수화에서 진전된 실천적 공간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헌데 현실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이다. 감성으로 해석된 시공간으로서 산수가 내밀하며 상징성을 띤 비의의 세계로 나타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 감성의 막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산과 물과 바람과 마음의 움직임은 화제로서 산수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삶을 관통하는 기운의 원천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마음작용으로 일어난 현실계, 그곳의 모습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이다. 그림은 이 물상의 외면과 내면을 그린 것이기에 꽃과 새와 얼굴과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색채의 흐름 속에서도 현실계의 진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식은 ‘물(物)은 하나의 이(理)이니 그 뜻에 통하면 곧 맞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정서와 회포를 자아내는 풍경으로서 ‘풍정’이 산수와는 다른 세계이되 또한 같은 것임은 이러한 이치에서이다. 말 그대로 자연을 빌지 않은 마음 속 풍경으로서 존재할 수 있으며 세상 모든 물상을 통해 화가는 진정한 궁극의 자연원리를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그린 인물화, 삶의 한 단상을 그린 일상의 모습 모두 산과 물과 바람과 그리고 마음의 작용으로 일구어내는 회화의 세계이다.

    한편 짐멜이 강조한 개인의 취향이나 장식이 중심으로 작용하는 현상 이를테면 개인의 물건이 종합되어 하나의 정체상이 성립되는데, 이 전체상은 철저히 개인적이어서 개인의 인격을 드러내게 된다고 하였다. 미술사에서 집단화된 현상과 개인에 의해 선택된 현상은 실상 긴밀한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산수, 풍경 혹은 인물, 초화 등 여러 제재 속에서 선택되고 나타나는 양상들은 사회적인 것이며 개인적인 것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화제를 취하는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에서 시작된다. 결국 산수는 근대 이전에 그러했던 것과 같은 이데올로기로서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산 혹은 물 혹은 풍경이나 자연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정에 의해 조절된다. 화면에 투사된 모든 대상은 풍정으로서 자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