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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ㆍ수ㆍ풍ㆍ정-조은정(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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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정(미술평론가)

자연에서 산수로

형호는필법기(筆法記)에서 노인을 만다 문답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회화관을 드러내었다.

 

내가말하였다.

그림이란 아름다운 것입니다. 형태를 귀하게 하여 진()을 얻으면 어찌 이것을 나쁘다 하겠습니까?"

노인이 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림이란 그리는 것이다. 물상을 헤아려보고 그 진()을 얻는 것이다. 물질의 아름다움에서 그 아름다움을 취하는 것이고 물질의 실()에서 그 실을 취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질이 된다고 고집해서는 않된다. 만약 술()을 모르면 그럴듯한 형태는 가하나 진을 도모할 수는 없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엇이 형태고 무엇이 진입니까?”

노인은 대답했다.

형태라는 것은 그 형()을 얻어 그 기()를 남기는 것이요, ()이라는 것은 기질이 모두 왕성한 것이다. 모든 기는 아름다움을 술하고 형상을 남기는 것이며 상은 죽는 것이다.”

 

그는 그림을 내형과 외형으로 나누고, 회회는 물상을 그리는 것이 목적이되 외형이 아닌 물상에 내재한 진실을 나타내는 행위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결국 모든 그림에는 진실이 존재하며 그 원천은 생명력이다. 회화의 목적이 형태에 내재한 진실의 표현에 있기에 외형의 아름다움만을 취하는 것은 결국 그림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이다. 모든 물상의 총체는 자연이기에 산수화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연구대상이 되어 왔다. 헌데 형식으로서는 자연의 외관이지만, 진실은 파악되는 것이므로 실상 그 내용은 그리는 이의 사상과 경험이 총체되어 투사된 심상의 표상이다. 인상의 공간이 아닌 자연의 상징이자 관념의 표상이 된 산수에서는 시대의 기운과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이데올로기가 표상되어 있다. 자연에 비추어 미흡한 존재인 인간이 강조됨으로써()와 공()의 개념이 강조된 그 공간에 인간의 관념은 거주하고 그래서 현실은 조종되었다. 산수화가 사대부가 지닌 세계관의 반영이 됨으로써 단순한 자연이란 본령에 더하여 정치색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와 유사한 외형을 띠는 서양화의 풍경화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숲을 돌아드는 길목에 존재하는 돌로 만든 정교한 다리와 웅장한 성채, 넓은 들판은 이곳을 다스리는 영주 혹은 국가권력의 상징이다.

그림으로서 산수화에서는 자연이라는 표면의 이면에 당대의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 비록 몸은 시정에서 정치를 하고 있지만, 마음은 산 속에 들어가 동자 하나 데리고 은일하며 도를 닦는 것이 이상이라는 이념의 표현으로서 산수화가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여 자연의 위대함을 읊조리게 하는 산수는 속세를 떠난 세계관의 반영으로서 은일(隱逸)을 포용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의 공간으로 화한 것이다. 노장사상과 더불어 자연에 머무는 은일사상은 선비, 관직에 나간 사대부가 산수화를 애호하면서 정치적으로 도구화 하였다. 그리하여 박물관에 걸린 수많은 그림 속에서 여성이 제작한 것이 확실한 산수화를 만나는 일은 아주 드물게 되었다. 이상으로서 자연, 이데올로기의 공간은 여성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

르페브르에 의하면 공간은 삶의 조건과 체험의 장으로서 사회적 산물이다. 물론 그는 자본주의 시대 이후 도시문제를 고찰하기 위한 방안으로 공간의 사회성에 주목하였지만, 경험으로서 공간이 실천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양상은 이데올로기의 구현체로서 공간을 규정함 수 있게 하는 논거를 제시한다.

이상적 공간인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만하임에 의해 적절히 설명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 둘은 존재와 불일치되는 즉 현실과 동떨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존재초월적 표상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런데 유토피아는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여 새로운 이상을 현실에 실현시킬 가능성이 있는 개념이다. 유토피아는 현실을 초월하여 나아가는 동력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반면 그는 이데올로기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기존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때문에 유기적인 변혁이 따르지 않으면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란 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와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비판하는 유토피아의 순환과정으로 파악된다.

정치적으로 완벽한 이상향인 유토피아는 고대 아르카디아의 모습을 띤다. 산수화는 근본적으로 선경(仙境)에 기초한다. 배를 타고 도달하게 되는 장소로서 유토피아 혹은 이상향은 고대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여전히 존재하는 공간이다. 상이한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는 지점에 있는 존재로서, 이데올로기의 현상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정반합에 이르는 완벽한 지점이자 푸코에 의하면 부유함으로서만 이를 수 있는 그 어느 위치에도 속하지 않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상향이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은 주체성의 문제를 동반한다. 푸생은 자연의 풍경과 이상향을 조합시켜 죽음과 삶이 넘나드는 공간을 표상하였다. 한편 현세적인 쾌락을 예찬하는 와토의 아르카디아는 완벽한 사랑이 도달히는 연인들의 장소로서 나타난다. 동양화의 선경, 이상향은 위대한 자연에 인간을 포함시키는 기제로서 신선 혹은 방문자를 동반한다. 그곳에 일상인으로서의 여인은 없지만 마고할미 같은 신선이 머무는 곳으로서 도석화에서는 선경이 존재한다. 산수화의 세계에 머물고 노니는 이들이 제공됨으로써 산수화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가상의 유토피아가 접합되는 공간으로서 존재한다. 그리하여 여성에게는 실현가능 한 공간으로서 유토피아도 이데올로기서도 산수화의 세계는 허락되지 않는다. 다만 지배적 이념의 상반된 위치에 있는 도교적 세계관에서 생명성으로써 여성성은 용납되고 수용되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산수와 풍정

조선시대 사회의 제도를 규정한경국대전에는 도화서 화원을 선발하는 시험인 시취(試取)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예전'취재(取才)’조에 따르면 죽() 1, 산수 2, 인물? 영모 3, 화초(花草)

4등으로 정해 놓고 있다. 또 채점도 각기 등급이 있어 예를 들어 대나무에서 통()을 받으면 5, 보통인 약()을 받으면 3점인데 가장 덜 중요하게 여긴 화초의 경우 통을 받으면 2, 보통을 받으면 1점이어서 대나무의 보통을 받는 경우 화초의 통을 받을 경우보다 더 높은 점수를 얻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등수가 높은 두 화제인 대나무와 산수를 선택하여 모두 약을 받는 경우가 인물과 영모 그리고 화초를 선택하여 모두 통을 받을 경우보다 높은 점수를 받게 되므로 점수가 높은 화제를 선택하는 것이 유리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 대나무와 산수라는 화제는 당시 사회가 원하던 또는 모름지기 화가라면 통달해야 했던 분야로 규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산수화의 발생에 대해서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미 송대 휘종연간에 출간된선화화보(선화화보)에서는 그림의 주제를 크게 10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회화10()이라 일컬어지는 도석인물궁실번족룡어산수축수, 화조묵죽소과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며 화제의 구분은 산수인물사녀영모화훼초충화훼죽 등으로 구분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세월이 지나도 산수는 화목으로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형호는산수론에서 "무릇 산수를 그릴 때에는 뜻이 필보다 앞선다(凡畵山水 意在筆先)”고 하였다. 자연보다 그것을 그리는 작가의 마음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이는 주관정신의 중요성을 일컫는 것으로서 산수화의 발생이 장자를 중심으로 하는 학파인 현학풍(玄學風)의 유행에 영향받은 것에 기인한다. 현학풍은 자연에 사는 은일사상의 시문학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자연과 자연의 화친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상은 사실 이미 주대부터 시작된 것으로도 파악된다. 장자의 나비의 꿈은 자연세계의 기쁨을 말하는 것으로서 결국 자연에 대한 미의 예찬으로도 인용된다. 노자는 무위론을 통해 자연의 순환과 반복을 설명함으로써 인간이 자연에 다가가는 사상을 유포하였다. 노자상원(象元)편에는 사람은 땅을 법도로 삼고 따르고땅은 하늘을 법도로 삼고 따르고하늘은 도를 법도로 삼고 따르지만 도는 자연을 따라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라고 하여 만물의 생육화성이 도이며 자연의 모습임을 말하고 있다. 산수화는 자연을 그린 것이므로 결국 산수화에는 자연의 이치가 표상되어 있는 것이다.

명산대천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상이 강화되어 나타나 것은 위진이 멸망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활동적인 사회로부터 은거를 선택하게 된 배경은 노장사상에 의해 영향받아 정당성을 확립한 것이었다. 결국 인간세계인 현실계에서부터 거리가 있는 자연계에서 기쁨을 찾는 것은 도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기에 당여하다는 생각은 정치적 사건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지속될 수밖에 없는 사상이기도 했다. "유가는 인간을 사회화하고 도가는 인간을 자연화 한다.” 고 하였다. 현실계를 등질 수 없는 지식인에게 유가의 가르침은 현실성을 확인시켜주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꿈이 좌절되었을 때 지식인들은 마음을 조절하는 지혜나 철학이 필요했고 그것을 은일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가와 유가의 절묘한 조합은 바로 은일사상에서 나타나며, 그것을 가시화한 대상이 산수화인 것이다.

화제로 산수화를 선택함은 자연의 표상이기 때문이요 이를 그려내는 데는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사상을 중시하게 되었다. 명대 설강은 "그림 속 산수는 의리가 심원하고 의취가 무궁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의미가 무궁무진하다며 여러 화목 중 산수화를 최고로 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자연이 무궁무진하므로 이를 취한 작가의 사상도 무궁무진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문징명도 "고인 일사들이 왕왕

산수를 즐겨 그렸는데 스스로 잘못 생각하였다.” 고 하여 산수를" 그릴 때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의 생각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즉 주관적인 감성이 산수를 완성시키는 매개로 보고 있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산수화에 대한 이론을 처음으로 펼친 사람은 고개지(顧惜之)이다. 그의 책은 이름만 전할 뿐이지만 자연에 대한 관찰을 기반으로 한 사실적인 표현으로 산천을 그려내었다기에 구체적으로 산수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이 드러난다.화운대산기(盡雲晏山記)에는 하늘과 물은 청색으로 표현하라는 것이 그러한 것들 중 하나이다. 그는 전신사조(傳神寫照)와 천상묘득(遷想妙得)을 강조하였고 이는 감정이입과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다. 종병(宗炳) 또한 노장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화산수서(盡山水敍)>에서, "성인은 도를 품고서 사물에 응하며 현자는 마음을 맑게 하여 형상을 음미한다. 산수에는 질에서 영을 취함으로써 ...명산에서 즐겨 놀았다. 이것이 인자와 지자의 즐거움이다. 대저 성인은 신으로서 도를 발하지만 현자는 산수를 통하여 형으로써 도를 아름답게 하니 인자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라며 산수화란 형태의 질을 찾는 것이고 이는 곧 도를 구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명산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내가 려산(慮山)이나 형산(衡山)을 그리워하고 형산(荊山)과 무산(巫山)에서 살아가며 장차 늙음을 모르고 정기를 굳게 하여 몸을 바르게 하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발목을 상해서 돌아올 때에 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여 구도를 잡으니 이것이 운령도(雲嶺圖)이었다:’라고 한 것이다. 동기창은 왕유(王維)를 일컬어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 하였다. 이는 시화 회화의 서정적인 속성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형호(荊浩)는 앞서 말한 것처럼 필의(筆意)를 강조하였다. 바로 작가의 의도가 산수화에서는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도나 비례 등을 통해 나타나며 그림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곽희 또한 많은 것을 보아서 마음 속에 사상을 채우고 넓게 나타낼 수 있는 기교를 구하려 함으로써 대자연 속에서 예술적 수양을 하여 예술의 경지를 확고히 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모든 산수

화에 대한 논의 속에는 경험의 대상으로서 산수를 통해 창작을 해낼 것을 주장하는, 곽희에 따르면 멀리서 볼 때는 세를 취하고 가까이서 볼 때는 진을 취하라는, 자연의 파악과 자연을 통해서 정신성을 얻을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곽희의 사상을 흡수한 안견이 산수화에서 일가를 이룬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 중 현재 확인되는 것은몽유도원도(1447)만이 확실한데 도연명의도화원기와관계가 깊다. 이 작품은 좌측의 토산으로 이루어진 현실계와 우측의 골산으로 이루어진 선계가 안개 등에 의해 명확히 구분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정선의금강전도> 에서도 토산과 골산으로 음과 양을 표현하고 있어 산수가 실제 자연경관을 기반으로 한 해석임을 선인들의 사상에 따랐던 조선시대 회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여성과 공간으로서 산수

경험의 실천장으로서 공간에 근거하여 볼 때근대 인상주의 여성화가들조차 자신이 거주하는 집안의 뜨락과 아이들이 오가는 실내 오페라극장의 객석 그리고 기껏해야 경마장이나 파리교외를 그렸던 것은 그들의 경험이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드러낸다. 경험으로서 자연인 풍경이 몸의 기록을 제한하였음을 알리는 것처럼 동양의 이상으로서 자연인 산수는 사유를 용납하지 않았던 세계였음을 알려준다. 공간은 사유를 조종한다. 그런 면에서 여성화가들이 산수화를 많이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공간적 제약이 있음을 의미하며 곧 사유의 한계를 의미한다. ‘

미술사학자 이성미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이름이 전하는 여류화가는 17명이며 이중 5명의 작품만이 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미미한 정도인데 이는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자연은 사회적인 세상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