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장르와 경계 사이, 당대 한국화의 조형적 현상과 방향 | |
---|---|---|
관련링크 |
|
한국화여성작가회 2023년 세미나 발제
장르와 경계 사이, 당대 한국화의 조형적 현상과 방향
홍경한(미술평론가)
“급격한 사회 환경의 변화에 비해 여타 주변의 변화는 더디고, 정보가 넘쳐 포화 지경에 이른 나머지 의미의 부재를 드러냄은 경계해야할 시대이다. 이제라도 작업의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는 자기 정체성과 한국화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한국화의 경계와 확장성에 대한 질문)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진지한 차원에서 제기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진보적이고 활발한 연구와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화여성작가회』의 연례 세미나는 한 단체의 특성을 규정짓는 차원을 넘어 당대 미적 상황과 흐름을 스스로 수용하기 위한 열린 태도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적이다.”
고수(固守)와 변화 사이 현재 한국화(韓國畵)는 다분히 다원화된 시각아래 놓여 있다. 오랜 시간 조형적으로 양분되어 온 구상성과 추상성은 물론 물질적, 이념적 해석이 모호해졌고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개별성조차 무의미한 혼재의 양상을 띤다. 동시대미술에서 한국화는 무수히 많은 개별성을 부여받기에 대표적 양상을 가려내는 것이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동시대 한국화는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하는 일련의 단면들을 접할 수 있다. 부동의 맥락 속에서 하나의 경향을 고수한 채 미적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는 전통적인 작품도 여전히 강한 흡입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비전통적 수법을 근간으로 한 작업들, 예를 들면 실험적이랄 수 있거나 획일적이지만 격정적 작품으로 자신의 내적 미감을 분출한 작품들도 드물지 않다. 장르의 경계를 해체한 채 가변적이고 공간 장악력이 훨씬 강한 설치미술의 일환으로, 특정한 스타일, 유행의 흐름에 종속되는 현상도 작금의 한국화에선 쉽게 열람된다. 특히 지필묵이라는 정형적인 틀을 넘어 자연과 동화되는 거대함으로, 또는 반형식적 충동에 의해 전통의 범주에서 벗어나 현대예술로서의 확장을 ----------------------------------------------------------------------------------------------------------------- 1)한국화(韓國畵)라는 용어는 근대 이후 한국의 전통적인 기법과 양식으로 그려진 그림을 서양화와 구별하기 위해 명명됐다. 그 밑동엔 우리의 사 상과 생활이 놓여 있으며, 화론(畵論)과 화법(畫法)이 서구의 것과는 판이하다는 점에서 변별력을 지닌다. 물론 동시대에 이르러 한국화(동양 화)와 서양화를 구분하여 논하는 것은 다분히 재료와 형식 중심의 개념이며, 정작 작품의 예술성을 말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2)작가와 작품이 갖는 개체별 응축력에 따라 색을 달리할 뿐, 표현방법 등을 포함한 형식의 다원성, 표현 언어 등에선 다각적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 으로 이해 가능하다.
꾀하는 작업 또한 심심찮게 목도할 수 있다. 이 밖에도 형상보다는 이념을 추구한다거나, 전통과 현재의 교집합적 메시지(message)를 뚜렷하게 표현하는 조형언어로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만들어 가는 작가들도 있다. 이제 한국화는 기존의 태도를 고수하거나 혹은 그것에 대한 이탈 또는 전면합일을 주창함으로서 현 시대에 맞는(혹은 맞다 여기는) 변화의 길에 서 있다. 소위 전통성을 중시하는 흐름이 있는 반면, 양식적으로 재료와 형식보다 아이디어를 중요시하는 경향에 따른 물질과 개념의 충돌, 실존주의적 사고와 형이상학적 사고의 대립 및 호흡으로 인한 흡입과 팽창의 힘이 상호 엇갈리면서 현대미술이라는 거대한 덩어리에 위치되고 있다.
‘한국성’이라는 것 복잡다단하고 고만고만한 미술경향이 지배적인 오늘의 상황에서 미술가들은 더 이상 개성을 발하기 힘든 자리에 있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미술계는 서구적 첨단성이나 메커니즘, 아이디어 위주의 성질을 갖는 작업을 나열하거나 고답적 작업 대신 서구 사조를 남보다 빨리 도입하여 이 땅에 전파시키려는 문화 중개상의 역할을 자처하는 작가들로 넘쳐났다. 또한 새로운 사조를 전파한 선구자라는 허울 좋은 대접을 받길 원하는 이들도 도처에 널려 있다. 허나 그럴수록 우리 것을 찾아 나서는 것이야말로 경쟁력 면에서 승산이 있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자 정체성의 상실을 염려하는 지금의 사회에서 가장 원론적인 접근법일 수 있다. 비록 바깥이 변하면서 내부의 독자성이 옹립되는 상황이긴 해도, 소위 한국적 정서가 묻어나는 경향의 작품들은 그만큼 변별력을 가중시키는 요인이었음이 사실이다. 다만 기대와는 달리 한국적이라고 하는 작품들의 면면은 실망스러운 것들이 많다. 서구적 관점의 대척점에서의 전통성, 한국성이란 용어의 정의, 집단적 특성을 규정하고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테두리는 빈약하고 형식과 방법론조차 남루한 예도 적지 않다. 문제의 시작은 ‘독만권서(讀萬卷書) 행만리로(行萬里路)’의 부재에 있다. 즉, 추사의 말처럼 한국화의 진정함을 찾기 위해선 만권의 책을 읽고 만보의 걸음을 행해야 하지만 그리하지 못하고, 우리 고유의 사상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을 허정지심으로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음에도 한참 부족하다. 특히 서구의 기법과 양식을 차용하는 과정과 우리 미술 사이에서 발생하는 조형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모색, 수용해야 할 당위성도 허약하다. 그저 그럴싸하게 전통의 현대적 번안이니 재해석이니 하면서 껍데기(무늬)만 가져와 한국성을 말하는 작품들이 너무나 많다. 이처럼 ‘시공간의 나이테’를 도외시한 채 겉만 베끼는, 내적 운율 없이 ‘여백의 미’ 운운하는 작품에선 “척 봐도 한국인이 그린 그림이 진정한 한국적인 것”이라는 근대 미술사가 김용준의 발언을 느낄 수 없다. 사실 옛날 산수화에서 일부분을 거둬들이고 오방색을 쓰며 옛 백자의 상감기법 따위의 적용이 완숙하게 이뤄졌다 하여 그것이 한국적 감수성과 정서를 반영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많은 작가들은 한국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전통적이라는 형상들을 인용하고 그것들로부터 일정한 형식을 빌려오지만 본질은 그것을 따르지 못하거나 약한, 어느 면에선 오히려 한국적이지 않은 채 국적불명의 그림이 되는 결과를 도래시키고 있다. 더구나 작금의 한국화의 많은 부분에선 참되고 값진 경험에서 비롯되는 현실의 여운들, 당대성이 좀처럼 묻어 나오지 않는다. 한국의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며 한국의 문화생활과 역사를 간직한 동질성을 느낄만한 애절한 감정이 배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판단에 동시대 한국성이란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미감과 감성, 그리고 정서를 현재로 복원시키는 것이다. 외피만 모방한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삶의 진실함과 세상의 진리를 예술의 언어로 토해내었을 때, 그리고 우리역사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애착을 가지고 옛 선조들의 사상이나 정서를 완벽히 소화, 실현시키려 할 때 비로소 올바른 한국성을 획득할 수 있다.
형식이 아닌 ‘정신’의 계승 한국화를 둘러싼 주변의 변화 속에 일부 작가는 전통에 도전하기도 하고 전통과 현대의 새로운 통섭을 실험하기도 하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서구화 바람에 맞서 전통적 회화의 원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서양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전통회화는 분명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이고, 우리의 시각예술분야에서 한국화(동양화)의 맥을 잇는 것 또한 의미적이다. 그러나 앞서도 언급했듯 재료와 형식 중심으론 한계가 명백하다. 그렇다고 한국성에 대한 연구를 낙후된, 구태의연한 것이라고 말할 순 없다. 되레 목소리만 큰 미술보다 동시대에 있어 경쟁력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필자는 가급적 예술지평의 확장에 스스로를 의탁하길 권한다. 전통도 좋고, 자연주의도 좋고, 우리 것에 대한 고집스러움도 환영하지만 시대변화에 맞는 언어를 찾아가는 것도 유의미하다. 그것은 일종의 진보요 새로운 조형방식에 관한 또 다른 탐구다. 오늘날의 한국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이란 인간과 자연 세계에 대한 탐미, 절제의 미와 사색의 미, 불완전한 인간 존재의 포용 등이다. 인문학적 문기와 인간적 품격도 빼놓을 수 없다. --------------------------------------------------------------------------------------------------------------------- 3) 외형에만 치우치는 작업에선 박수근이나 박생광, 이응로, 장욱진 등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정감과 멋이 없고 가벼운 반면 너무 화려하 여 지극히 형식 지향적이다.
이는 모두 형식상의 유사성이 아닌 ‘비가시적인 것’으로서의 ‘정신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정신성을 잇고자 하면서도 형식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치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 표현 영역을 어떻게 확장시킬 것인가에 관한 의지가 요구된다. 그러하려면 당연히 재료와 형식의 경계를 넘어 ‘시각예술’이라는 보다 커다란 통합적 무대로 진입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동시대미술의 흐름에 대한 세심한 고찰이 필요하다. 허면 동시대미술은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일단 동시대 미술은 장르 간 학제 간 경계가 없다. 컨템포러리 아트 자체가 형식적, 이론적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술 도그마(dogma)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격상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왕래, 이동을 통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영역확장, 새로운 가능성 모색이라는 정신적, 물리적, 관념적 여정과 맞물린 모든 상태를 지향한다. 이중 규칙을 붕괴시키며 분계를 재편하는 ‘탈(脫)경계’는 동시대미술의 성격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이다. 이를 두 개의 관점으로 정리하면, 첫 번째는 거시적 관점에서의 탈경계다. 이는 지리적, 역사적, 사회적, 민족적인 프레임은 물론 국가주의, 통합주의, 전체주의와 같은 획일적 맥락(context) 외에도 제도·상품·자본·노동 등 인간 삶을 지배하고 ‘포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탈주를 추구한다. 두 번째는 미시적 관점에서의 탈경계로, 정신과 물질의 교류, 고급과 저급의 무용, 사이버 공간처럼 시공간조차 경계두지 않는다. 분리되었던 작가와 관객의 예술주체이양과 평등화, 엘리트와 대중 간 간극 허물기, 상업성과 순수성 및 예술품과 일반 사물의 가치구분마저 파괴함을 넘어 주제, 소재, 기법 등의 다양한 조형언어의 고정관념까지 해체한다. 장르와 경계 사이를 오가는 작가들의 작품은 대개 ‘시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에겐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회화, 사진, 조각의 전통적 표현방식은 진부하다. -------------------------------------------------------------------------------------------------------------------
4)동시대미술은 언어, 이념, 풍속과 양식이 교류 및 교합한 채 이전과 다른 흐름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의 미술이다. 모 던과 포스트모던이 하나의 인상파나 큐비즘 같은 ‘사조(-ism)’라면 ‘컨템포러리 아트’, 즉 동시대미술은 시간의 개념을 지닌다. 그러므로 당대 미 술은 언제나 ‘컨템포러리 아트(동시대미술)’다.
5)현대미술을 모던아트(Modern art)라고 한다. 여기서 모던(Modern)은 17세기 이후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지속돼온 서구 중심의 이성적 사 유체계를 바탕으로 한 역사를 가리킨다. 20세기 중엽부터 현재까지의 미술에는 모던에 포스트(Post)라는 접두사를 붙인다. 모더니즘의 사고체계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모던의 연장선상에 있으므로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포스트모던 역시 갈수록 심해지는 비결정성, 불확실성, 탈중심성, 다양성을 지닌 현재의 사회와 오늘의 미술을 소화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생겨난 용어 가 ‘컨템포러리 아트(Contemporary art)’다. 6)탈경계란 경계를 벗어남이 아니라 각각의 경계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직렬식이라기보다는 병렬식에 가깝다. 통제, 관리, 지배, 통치라는 지휘적 명제들과 끊임없이 대결하며 이전과 다른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를 갖는다. 따라서 탈경계 내에선 어느 한 문화가 다른 문화로 병합 혹은 종속되지는 않은 채 끊임없이 그리드(grid)되거나 침범-결합된다. 문학·음악·미술 등 문화와 문화 간 적극적인 교섭과 상호 교류를 통 해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생성한다.
시간과 공간을 텍스트화 하며 적극적으로 탈장르화 한다. 설치, 영상은 물론 오브제·미디어·건축·음악·퍼포먼스·무용·연극 등, 수용 가능한 것들을 최대한 활용해 ‘혼합 감각적인’ 예술을 창조한다. 이들은 과거 범접할 수 없었던 장소에 무언가를 공존, 혼용시키는 방법으로 자신만의 메시지를 생성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대중의 정서를 도외시 않고, 변별을 두지 않으며 참여를 유도하거나 그들이 곧 예술가, 예술작품의 완성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한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민주적이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위반, 초월, 탈주 등의 개념을 공존, 혼종과 같은 또 다른 개념으로 소환하거나 직조해 왔다는 점이다. 하나의 작품이 보여지고 보는 방식에 따라 어떤 형식으로든, 또 다른 예술 장르화 될 수 있다는 것과, 지리적·역사적·지형적 표상으로 경계를 교차시키고 가로지르며 선 넘기, 이동하기를 이용해 새로운 조형언어로 제안해 왔다는 것도 공통분모다.
당대성의 기표로써의 예술 ‘정신’을 간직한 탈경계가 생성한 반작용이 그 자체로 이전과 전혀 다른 미적 경험을 유도하고 새로운 소통방식을 꿈꾼 채 관객들에게 세계를 읽는 다양한 창(窓)이 되어준다는 점이야말로 장르와 경계 사이에 놓인 동시대미술의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탈경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당대성’(contemporaryity)이다. ‘동시대성’으로도 불리는 당대성은 오늘날의 상황과 관련된 의제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가치추구와 표현을 아우른다. 예술과 문화의 맥락에서 당대성은 동시대 생산되고 경험되는 세계의 관심사와 같은 선상에 놓이며, 그 지속적인 변화와 복잡성을 반영한 채 우리 사회를 형성하는 문제와 논쟁 등을 포함한 내외적 의미들을 포괄한다. 당대성은 매우 역동적인 개념이다. 끊임없이 진화할뿐더러 오늘날 동시대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결국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한다. 미래에는 새로운 형태의 동시대적 표현이 나타날 것이지만, 당장의 우리에겐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본질과 관련된 정의를 모두 포박하는 셈이다. 글로벌사회(Global society)에서의 예술은 국가별 편차(偏差)라든가 사조의 간극을 발견하기가 어려우며 단지 작가 간 개인차만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화에서 그 개인 간 차이의 적용에는 잣대가 없으며 그 잣대의 설정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만의 전통적인 가치의 실현이라든가 글로벌리즘과는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분명히 유효하다. 따라서 우리에겐 한국화의 정체성과 구분적 시선마련을 위한 깊은 연구와 논의가 이뤄져야하는 과제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제를 풀어 나가는 역할은 각자의 몫이자 『한국화여성작가회』와 같은 집합체들의 존립 목적이어야 한다. -------------------------------------------------------------------------------------------------------------------- 7)참고로 탈경계가 현대문화예술에 새긴 의미는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잡다단한 시대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기표라는 사실이다. 각 기 다른 군도의 공존적 집합을 특정한 무대로 불러들여 관계를 맺고 통합이 아닌 차이를 이어나가는 데 중요한 ‘번역’의 역할을 한다는 것도 하나 의 말머리에 포함된다. 8)물론 당대성은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고 철학, 미학, 사회학, 정치, 기술과 같은 다른 영역으로 확장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한국화여성작가회』의 의미 고유의 양식이 존재했지만, 서양 미술의 관계 속에서 개성과 특수성을 인정받으면서 현대미술로서의 가능성과 가치에 대응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는 한국화의 미래와도 연결된다. 특히 작품 속에 깃든 혹은 추구해온 한국적 정서와 민족적 정신 못지않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인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자문은 독백을 넘어 공히 잊지 말아야할 명제다. 이 명제를 잇기 위한 방법으로는 단체의 합의된 목소리도 간과할 수 없다. 급변하는 미술흐름을 직시하되 그 속에서 발아(發芽)하는 자체적인 발언이나 현 시대에 맞는 다양한 시각과 개성이 존중 된 집중성을 부각 시키는 데도 일정한 단위별 움직임은 절대적이랄 수 있다. 『한국화여성작가회』를 비롯한 국내 대표적인 단체들의 존재이유도 이에 준한다. 잠시 우리나라 단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고 혼잡스러운 개별성에만 초점을 맞춰 그저 맹목적으로, 혹은 정기적으로 의무처럼 작품을 출품하는 것에 멈추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고 아직도 봉건적인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해 밀어주고 끌어 주는 데만 온 역량(力量)을 다하는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단체의 진정한 의미는 현 미술계의 원활한 소통과 고지(告知)가 담긴 지침을 전달/ 공유하는 역할일 것이며 거시적 관점에서의 발전적 대안을 제시하거나 나와 단체, 우리 미술계를 위한 양분으로서의 위치를 획득하는 데 있다. 그러할 때 이들이 모여 만드는 전시들은, 그들이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들은 중요하게 인식되며 비로소 참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 한국화도 별반 다르지 않으며 이는 우리가 『한국화여성작가회』를 바라보는 눈이기도 하다. 한국화단을 이끄는 대표적인 작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한국화여성작가회』의 참다운 의의는 한국화의 역사를 몸으로 체험하고 지탱해온 작가들과 앞으로의 전개를 짊어질 창작가들이 함께하여 이 땅에서 전개되었던 한국화에 정당한 자리매김을 부여하고 과거의 현상을 명확히 인지하는 과정을 실현시키려 한다는 점, 그리고 그 실현성을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화의 좌표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는 작지 않다.■
글|홍경한은 미술평론가이자 전시기획자다. 미술전문지 월간 <미술세계>와 <퍼블릭아트>, <경향아티클> 편집장을 지냈으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이사, 대림미술관 사외이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위원, 부산비엔날레 집행위원, 서울시립미술관 예술감독, 강원비엔날레 예술감독 등을 역임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 인천시립미술관 소장품 심의위원을 맡고 있다. <경향신문>과 <메트로신문> 필진이자. 오는 2024년 1월 개관하는 공공 복합문화공간인 ‘LHC 라키비움’ 예술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교양서 『공공미술, 도시를 그리다』와 비평집 『고함』, 『기전미술』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