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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로움의 논리를 초극하는 ‘자기 안의 이야기’ - 진휘연 (성신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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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논리를 초극하는 ‘자기 안의 이야기’>

진휘연 (성신여대)

-새로움의 전통과 21세기의 갈증


지난 20세기는 ‘새로움’의 시대였다. 모더니즘으로 발화되었던 ‘새 것‘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에서나 이전과 달라진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관객을 교육했고, 미술가들을 열광시켰다. 그런데 온전한 ‘새로움’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모더니즘이 끝나는 50년대에 잇달아 제기되었다. 언어기호학적 분석에 의거, 기의와 완벽하게 짝을 이룬 기표의 존재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결코 기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끝없는 지연으로 인한 기호의 불완전성이 제기되면서, ‘새로움’이란 상대적 상태에 대한 기대도 무의미함을 논하게 되었다. 결국 어떤 것도 또 다른 무엇이며, 비교의 근거가 없다. 그러나 이런 본질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새로움’ 안에는 차이에 대한 긍정적 기대가 숨어있다고 하겠다. 온전히 새로운 것이 이론적인 오류라면, 적어도 미술계에 속한 누군가에게, 또는 관객들에게 사고와 발상을 자극할 수 있는 것에 새로움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모더니즘의 본질과 덕목에서 벗어남으로써 그것에 저항하려는 탈-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이 간과했던 요소들을 다시 조형적, 개념적으로 시도하는 반-모더니즘의 경향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1950년대 이후에, 새로움에 대한 기대는 색채를 바꾸었다. 예를 들어 피카소나 몬드리안과 같이,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형식이나 기법을 통해서 높은 수준의 새로운 결과물을 전달하기 보다는, 과거의 미술을 소재로 삼아 ‘차이’를 통한 비틀기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런 노력은 곧장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확대되었고, 관객들은 눈앞의 작품이 왜 의미 있고, 기존의 것과 다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긴 작품 설명서를 읽어야만 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로잘린 크라우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독창성이나 원본성(Originality)에 태생적으로 배타적이라고 보았다.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새로움의 정신이 더 이상 가치로 인정되지 못하고 반복을 통한 차이 만들기에 집중한다고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을 평가했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의 저서 <포스트모더니즘: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서 그것의 성격을 혼성모방과 탈역사화, 그리고 ‘narrative(이야기)’가 소멸되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많은 작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런 특징 안에서, 미술과 사회의 제도, 관습, 모더니즘의 덕목 등에 대한 소소한 반항, 저항, 비틀기, 탈-위치 등을 통한 탈-권력화에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지적(知的)이거나 재기발랄해 보이는 작품들이지만, 미술사에 대한 전체적 맥락의 이해를 전제한다고 하겠다. 또 다른 한편에선 시각적 만족도가 떨어질 수 있는 이런 작품에 대해, 외형을 과장하고 엄청난 자본에 기초한 ‘스펙타클’에 집중하면서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 올라프 엘리아슨, 렘 쿨 하스, 프랭크 게리 등) 대규모의 시각적 결과물들을 통해 새로움과 신기함을 만족시켜주려 하고 있다. 
한편 이제껏 시각예술의 발전 상황을 고려할 때, 미술의 형식에 더 이상 다양한 경제적 순기능을 갖는 새로움이 창출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에 부족한 역량을 고려, 융합과 혼성을 장려하기도 했다. 이질적인 것(장르, 내용, 형식)들 간의 섞임,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 간의 혼성을 통해서 새로움의 동력이 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융합의 결과가 관객들이 기대하는 방향에 순응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분명히 새로움은 여전히 갈망되고 있지만, 어떠한 모습이 관객을 만족시킬지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다. 자본의 집중을 통한 거대 프로젝트나 신기술을 사용한 매체 집중적 미술이 해답이 될 수도 있다고 믿지만, 오늘날 미술은 여전히 낯선 차이들을 생산하면서, 우리 주위를 선회하고 있다. 새로움의 전통 안에서, 한국 작가들은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의 이야기

최근 한국작가들이 세계미술계에서 많은 관심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국제 전시에 초대받는 일도 많아졌고, 활동 작가 수도 크게 늘었고, 작품의 다양성도 확대되었다. 그중에서도 여성 작가들의 비중은 눈에 띄게 증가할 뿐 아니라, 작품도 여성특유의 섬세함과 치밀함, 다른 시선을 지닌 ‘특별함’을 전달하고 있다. 한국 여성 작가들은 관객들과의 감성을 교감하는데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이는 여성 특유의 ‘자신의 이야기 공유와 소통’에 대한 습관 또는 훈련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활발해진 SNS를 비롯한 많은 사회적 소통채널의 사용에서 여성은 전 연령대에서 남성 사용자를 앞지르고 있을 뿐 아니라, 사용 시간도 현저히 많다. 공개된 장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감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그것을 자주 전달한다.  
모더니즘의 영웅적 창조자에 비견되던 남성 작가들이 형식의 새로움을 추구함으로써 시각적 코드를 다양화시켰다면, 오늘날의 다양성은 개별적이고 작지만, 흥미로운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서 탐구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제시하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경험을 통한 감정의 과정들, 분노, 슬픔, 기쁨, 사랑, 열정, 우울, 외로움, 희망, 환희, 절망, 열등감에서 오는 복잡한 심리상태의 불안과 욕망 등을 이야기함으로서, ‘나’에서 출발하여 세상과 관계 맺는 가장 보편적이지만 독자적인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작가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관찰하고, 사람들을 연구해야한다. 최근 세계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늘고, 이들이 발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회는 다른 사람들이 지닌 개별적인 경험들을 통해 다양성, 새로움을 발굴하고 감각적이고도 지적인 즐거움을 누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숨어있는 이야기의 힘’

1960년대 말부터 미술가/철학자로 활동했던 아드리안 파이퍼는 매우 특이한 작품을 제작했다. 미국내 첫 흑인여성 철학교수이자 첫 흑인여성 개념미술 작가였던 파이퍼는 피부색이 자신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정체성의 특징으로 보았다. 그녀는 <접촉반응 (catalysis)> 연작에서 남에게 불쾌감을 주거나 -냄새나는 물질을 옷에 바르고, 페인트 칠이 마르지 않은 옷을 입고, 입에 수건을 물고 있는 등- 이상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공공장소에 나타난다. 문자 그대로 접촉의 시점에서 상대의 반응을 관찰하려는 의도를 지닌 작가는, 거절의 대상이자 소외된 모습으로 자신을 가시화했다. 이후 <영혼을 위한 양식>에서는 한 달 동안, 금식하면서 매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육체는 마르고 축소되지만, 자신의 영혼은 수준 높은 철학적 지식으로 풍성해 가는 대비를 통해, 백인 남성의 이성과 지성을 담아서 새로운 자신으로 변신하고 싶었던 작가의 욕망을 보여준다. 
이후 <신화적 존재>라는 텍스트와 사진을 결합한 이야기 작품에서는 ‘백인’이 아니라는 오랜 열등감을 흑인영웅으로 대체했다. 작가는 불량스러운 흑인 남성으로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백인을 때려눕히고, 세상의 누구도 억압할 수 없는 자유롭고 당당한 존재로서의  모습을 통해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분열적 상태를 드러냈다. 파이퍼의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단순히 자신과 환경의 관계를 드러내고, 그만의 경험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체와 욕망의 대상간의 간극과 투쟁을 통한 존엄성을 획득하려는 과정이 처절하게 나타난다는 점일 것이다. 인간의 본질을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표현했던 파이퍼의 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지는 변화한 환경 안에서 새로운 존재방식을 요구한다.

결국 지난 세기에는 미술이 작품의 존재성, 작가와 관객의 역할, 매체와 재료, 표현과 수용, 공간과 환경, 과학과 기술 등, 하드웨어의 변화를 통한 새로움에 집중했던 시기였다. 이제 미술은 ‘나’의 이야기, 나의 경험과 심리상태에 대한 개별적 관심과 대응이라는 다른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화 여성 작가들, 한국화의 전통 매체를 사용하는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발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전달체(매체)에 익숙하면서도, 복합적이고 열린 정체성의 교차로에 서있다. 인간 욕망의 범주를 이해하고 매체와 결합시키는 노력은 기술 개발과 함께 가속화되어왔다. 새로운 매체를 완성도 있게 사용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개념을 발견하는 작가들과 함께 사회 안에서 영향력을 누려왔다. 이제 미술은 단순히 테크닉, 기술 같은 전달 방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기술은 각자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에서 필요한 운송 수단일 뿐이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깊은 사고에 기초한, 독자적인 경험과 감정의 발로를 지켜볼 것이다. 
자신 안에 가려져있는 감정에 집중함으로써, 남들과 다른 ‘나의 것’을 만나면서 새로움이라는 틀을 대체할, 소소하고도 재미있는 내용들이 담론으로 변화할 것이다. 자신 안에 내재된 무엇을 발견하려는 의지로 충만한 작품들안에서 새로운 싹을 발견하는 것 또한 큰 기쁨이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