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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술, 공감의 코드 - 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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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공감의 코드

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Ⅰ.
우리 안에 ‘셀프 셀프센트리쿠스’가 설쳐대고 있지만 ‘호모 엠파티쿠스’도 우리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이기심 바로 곁에 다른 프레임이 존재한다는 견해이다. 영어에서 ‘감정’에 해당하는 pathos에서 파생한 말들 중에는 apathy(냉담한,무심한), sympathy(동경,공감), antipathy(반감, 혐오)와 같은 말들이 있는데 이중에서 Sympathy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볼 때 그것을 바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 보며 거기에 자신의 감정을 결합시킨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특히 타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고 느끼고 이해하려고 할 때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렇게 이해한 바를 토대로 소통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소통이나 감정적인 몰입에 의해 자아의 투영이 아니라 ‘나와 다른 마음의 조건과 상태에 대한 참 이해’로 말할 수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테오도르 립스(Theodor Lipps)와 같은 미학자들은 ‘감정이입’(Einf?hlung)이라는 말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내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파악하려는 개념으로 사용한 바 있다. 영어 empathy의 어원은 독일어단어인 Einf?hlung인데 문자 그대로 ‘ 속으로 들어가서 느끼다’는 뜻이다. 립스는 이성보다는 감정적으로 그것들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칭하는 미학개념으로 이 말을 사용하면서 대중화되었다.1) 그런가하면 빌헬름 베르그송(Wilhelm Berson)은 이 미학용어를 빌려와 정신과정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다. 그에게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감정이입은 예술해석에도 영향을 끼쳤다. 하르트만(N. Hartmann)이 감정이입을 예술창작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있었다.

“감정이입이라는 개념은 미학상에서 극히 중요한 개념의 하나이다. 인물을 묘사하는 화가나 희극을 쓰는 작가가 그 인물의 특징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는 분석적이며 심리적인 모든 이해는 부족한 것이다.”2)

하르트만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감정이입이 예술작품에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대상에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는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나와 대상은 아무 관련도 없는 것이요 대상은 그저 하나의 모델이요 모티브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감상자들도 작가의 미묘한 울림이 결여된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관객 역시 깊이감도 부족하고 교감이 단절된 그런 작품에 대해 그다지 호감을 표명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이입은 예술가들이 대상과의 교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준다.   
그런데 립스는 감정이입에는 ‘긍정적인 감정이입(Die positive Einf?hlung)’과 ‘부정적인 감정이입(Die negative Einf?hlung)’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긍정적인 감정이입’에서 자유롭고 유쾌한 감정이 발생하는 반면, ‘부정적인 감정이입’이 작용하면 부자연스럽고 불쾌한 감정이 유발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옮기면 “긍정적인 감정이입이 성립되는 한 형식은 아름답다. 이 형식의 미는 형식속에서 내가 관념적으로 자유롭고 완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에 반해 나에게 이 일이 불가능할 경우, 즉 형식 또는 관조에 있어서 내적으로 부자유하다든가 억제되는 경우, 또는 어떤 강제성을 느끼게 될 때 그 형식은 추한 것이다”3)고 두 개념을 설명한 바 있다. 
립스의 감정이입은 대체로 ‘대상의 의인화’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즉 대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기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논점을 맞추는 대신 정작 대상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내력을 갖고 있는지, 나와의 관계는 어떤지는 소홀히 다룬다는 얘기이다. 물론 자신의 감정을 곁들이는 것은 예술이 주관의 산물인 이상 불가피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항상 진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술이 자기주관에만 몰입하다보면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예술은 대상의 존재와 무관하게 독백이 되기 싶다. 
낭만주의 이래 예술은 뮤즈의 선물이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천재들의 성역으로 불리어왔다. 그 결과는 사람들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예술가는 자기 현시에 급급한 나머지 감상자들의 즐거움을 앗아갔으며, 그 도가 얼마나 지나쳤던지 자끄 엘륄(Jacques Ellul)은 예술을 ‘무의미의 제국’이라고 했을 정도였다.4) 예술가는 다른 사람들과 서로 어울리는 기술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사람들과의 단절만큼 예술의 위기를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타인과도 소외되어 있고 심지어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다. 
이런 문제를 예의주시하였던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에 따르면, 두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두명의 살아있는 존재와 여섯 명의 유령’이 만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어떻게 두 인격이 만났는데 여섯 유령이 참여한다는 것일까. 첫째 각자가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전형으로 인지하는 두 명, 둘째 두 사람이 상대의 전형으로 품고있는 두명, 셋째 눈앞에 비친 두 사람 등 모두 여섯 사람이라는 설명이다.5)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상과 다른 사람에 대해 우리가 만드는 그림 등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전부터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란 생각이 인간 본성론의 지배적 프레임으로 자리잡아왔다. 그래서 이 사유프레임을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되어왔다. 우리는 다른 프레임을 흡수하고 내면화할 필요가 있다. 
바흐찐(Mikhail Bakhtin)은 타자와의 관계맺기, 상호이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은 본성상 대화적이다. 산다는 것은 대화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묻고 귀를 기울이고 대답하고 동의하고 하는 등등이 그것이다. 이 대화에 인간은 삶 전부를 가지고 참여한다. 눈으로, 입으로, 손으로, 영혼으로, 정신으로, 온몸으로, 행동으로, 그는 이 대화에 참여한다. 그는 자신의 전체를 말속에 집어넣으며 이 말은 인간 삶의 대화적인 직조물속으로,세계적인 심포지엄속으로 들어간다.”6)

‘관계는 우주의 영혼’(Leonard Sweet)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관계가 어그러짐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그 영혼이 병들고 말았다. 바흐찐이 주장하듯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인간이 타자와 더불어 산다는 것을 전제한다. 나는 타자의 형식속에 존재하며 또는 타자가 나의 형식속에 존재한다. 인간 형상은 나와 타자의 존재 형식속에 존재하는 셈이다. 따라서 인간이 형상으로 머무르는 한 인간형상의 완전한 사물화는 불가능하다. 적극적으로 본다면 나는 타자의 나로 존재하며 나는 타자의 만남속에서 내 존재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타자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불가피하게 타자와의 부단한 접촉속에서 살아갈 운명이다. 바흐찐에 따르면,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면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그는 전적으로 항상 주변속에서 있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의 눈을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다.”7) 실체적 경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식과 이성과 생각 자체가 ‘아프리오리’하게 존재하며, 탐구적 정신은 이런 것들을 에테르에서 골라내어 의식속에 저장하기만 한다는 발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정신생활이 예외없이 관계적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알고 있고 상대가 알고, 네가 안다는 사실을 내가 안다는 생각, 그것이 바로 정신이론의 진정한 개념이며 정신생활은 바로 이런 개념에 기초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8)
바흐찐이 말했듯이 우리는 실제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평생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거울로 자신을 본다는 것은 자신의 겉모습일 뿐 참 모습은 아니다. 자신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정확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외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타자의 삶을 통해 내가 어떻게 되리라는 깨우침을 받을 수 있다.  

Ⅱ.
이 글에서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타자관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한마디로 공감능력의 증폭으로 요약된다. 나와 타자의 관계가 불가분하며 운명적인 것이라면, 더욱이 나의 정체성이 타자의 관계를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면 공감력을 키우는 것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주관적인 감정이입을 벗어나 긴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감능력에 있다고 본다. 공감은 타인이 무엇을 느끼는지 알고 그것을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타인의 심리적 경험에 대한 나의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하고 소통하는 것까지 포함한다.9) 
데카르트는 인간이 신체를 가진 기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각신호를 정신에 보내 이성적 사고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해독하고 판단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생각을 별개의 영역으로 여겼고 그것은 신체적으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도 신체와는 독립적으로 활동한다고 보았다. 그는 신체가 경험하는 것중에서 불확실하다고 생각한 것은 남김없이 제거하려고 했는데 그가 말하는 것이란 불확실한 느낌과 감정을 뜻했다. 그는 감정을 ‘인간의 방정식’에서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느낌없이 합리적으로 계측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리프킨의 말에 따르면, 그런 존재를 미국 드라마 ‘스타트랙’에 등장하는 스폭박사에 비유했다. 스폭박사의 외모는 지구인과 닮았지만 인간의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존재였다.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데카르트의 오류』(Decart's Error:Emotion,Reason, and the Human Brain)라는 저서에서 “인간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긴요한 일은 일상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복잡성, 나약함, 유한함, 그리고 독특함을 상기시키는 일일 것이다.”10)고 했다. 과연 육체를 떼어놓고 인간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 존재의 육체성을 억누르고 우리를 진정한 물리적 방법으로 묶어주는 감정을 솎아낸다면 우리는 다름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즉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핵심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술작품이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복잡성, 나약함, 유한함, 그리고 독특함을 이해할 수 있는 창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고 그들의 영광과 슬픔, 그리고 환희와 좌절, 희망과 걱정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동료인간으로서 똑같은 인간의 감정과 느낌 등을 나누면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미술가들은 이전부터 이러한 공감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해왔다. 루오가 그린 <노동자>는 자신을 초라한 노동자로 묘사하고 있으나 같은 인간으로서의 따듯한 애정을 전하고 있으며 요셉 이스라엘스의 <노인의 죽음>은 죽음을 앞둔 노인의 초조함을 통해 그에 대한 연민과 슬픔을 나타냈다. 반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과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 역시 이런 공감의 중요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그들의 인생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공감하는 순간은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경험 가운데서 그야말로 전율이 느껴지는 생생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서민화가 박수근의 작품을 보면 공감의 위대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할 것없이 다같이 못살았던 시절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의 ‘함께함’은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일관된 특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11)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나무와 여인>에서는 척박한 환경속에서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써 박수근의 인물화에 대한 시각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을 그리던 무렵 인물화들은 곱상하거나 예쁜 여인의 모습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런데 대다수의 서민들이 가난과 굶주림,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미화는 별로 실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박수근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관념에로의 도주를 꾀하는 대신 동시대인과의 동거를 택하였다. 박수근은 자신의 힘든 처지에 집착하고 그속에 매몰되기보다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탁월한 공감능력을 나타냈다. 
공감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어떤 위치에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냉정한 이성적 원칙에만 기초하는 사회는 공동의 정서적 교감안에 우리를 한데 묶어주는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Tolstoy)는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모른다면 (---)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고 말했다.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우치는 말이다. 
박수근의 풍부한 공감능력은 <할아버지와 손자>
(1964)를 비롯하여 <나무밑>(1964), <노인>(1961), <시장의 사람들>(1950년대>, <노상풍경>(1962), 
<노인과 소녀>(1959)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낯섬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이다. 타자가 규칙적이고 편안한 나의 삶을 불규칙하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그 타자가 나와는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12) 만일 박수근이 타자를 불편한 존재로만 간주했다면 초췌한 노인들이 눈에 들어왔을까. 박수근의 작품에서 우리를 가장 낯설게 만드는 것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살아온 타자에 대한 시선일 것이다. 그가 다른 삶을 살아온 타인과의 거리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깊어지는 관계는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간다. 화가 박수근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그들의 편에 서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같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없애줄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해답을 내놓을 수도 없어요.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혼자 두지 않고 최대한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13)라고. 공감은 이렇듯 고통을 나누어가지며 어느 사람도 소홀이 여김을 받지 않도록 한다. 
Ⅲ.
박수근처럼 평소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 경우도 있지만 공감적 통찰은 뜻하지 않은 사건을 계기로 찾아오기도 한다. 헤리트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의 경우가 그러한데 지금까지 출간된 책중에서 가장 넓게 읽히고 영향력이 컸던 책중의 하나로 일컫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노예제의 역사적 현실과 폭력과 유혈이 낭자한 참상을 전달해주며, 급기야 에이브러햄 링컨은 헤리트 비처 스토를 만나면서 “이 거대한 전쟁을 발발시킨 책을 쓴 작은 여성이 바로 당신이군요”라고 인사말을 건네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파괴력 높은 책이 집필된 것은  아주 개인적인 사건, 즉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여섯째 아이 찰리가 신시내티를 휩쓴 콜레라에 감염되어 사망하는 슬픔을 겪으면서 부터이다. 찰리의 죽음은 그녀를 노예제 폐지론자로 바꾸어놓았고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한 사람의 여자이자 어머니로서 슬픔과 불의를 보고 마음이 짓눌리고 부서졌다. 그래서 그 글을 썼다”고 했다. 비처는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가슴을 후비는 고통을 체험했고, 그속에서 공감적 통찰이 이루어진 것이다.14) 공감은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며 더 깊은 연대감을 자아낸다.
미하일 바흐찐의 시각을 빌려 말한다면, 타자란 나를 완성시켜주는 존재이다. 내 스스로는 나를 쳐다볼 수 없다. 결국 나는 타인을 바라봄으로써 나의 존재가 어떻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단순한 객체가 아닌 나와는 떼래야 뗄 수없는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박수근 역시 타자에 관한 인식에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타자를 객체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애환을 나누는 인격체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들과 마음을 같이 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처지의 자아, 깨어진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지각능력을 D.J. 시젤은 ‘마음의 눈’(mindsight)이라고 불렀는데 그에 의하면 “공감은 사회적 지능과 감성지능의 기초를 형성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타인과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15) 어쩌면 타인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타인을 이해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이해받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근래에 회자된 ‘갑질’ 논란에 많은 사람들이 공분한 것도 인간으로서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흰 종이에 싼 금화 한 닢과 검은 종이에 싼 금화 한 닢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사람을 지위와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어떤 색깔의 종이에 싸든 그속에 금화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마저도 어느 정도 타인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의사들이 ‘질병인식불능증(anosognosia)’으로 부르는, 중증이라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 지점에서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내세운 ‘만남의 철학’이 새삼 눈길을 모은다.  마르틴 부버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는 대명제속에서 인간의 위치와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에 의하면 참다운 인간존재는 고립된 실존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형성하면서 드러난다고 본다. 그러니까 부버에게 있어 인간이란 그의 실존의 관계를 형성해가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실존의 기본적인 사실은 인간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부버에 따르면 현대인은 ‘나와 너’의 대화적 관계가 아니라 ‘나와 그것’의 비대화적 관계에 매몰되어 있다고 본다. ‘나-그것’의 관계는 우리 주위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여기서 타인은 그의 인격으로서가 아닌 도구로 파악한다. 즉 얼마나 도구적 효용성을 지니는가에 의해 파악한다는 것이다.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이런 관계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그의 인격적 특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지닌 도구적 유용성을 기준으로 평가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르틴 부버가 말하는 진정한 관계는 ‘나-너’의 관계이다. ‘나-너’의 관계에서 ‘나’와 ‘너’는 서로 전존재를 기울여 전인격적으로 관계한다. 이런 관계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적인 관계인데 자기 자신을 비이기적으로 상대방에게 주며, 또는 그 주는 것안에서 자기 삶의 실현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끼리는 이러한 관계가 영원히 이어지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끊임없이 일신되며 이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너’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모든 만남에서 인간은 ‘영원한 너’(the eternal Thou)를 만나게 된다. 그의 만남의 철학은 인간소외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유력할 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동거라는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고 본다.
1) Roman Krznaric, Empathy,A Handbook for Revolution,김병화역,『공감하는 능력』,더 퀘스트,2013,p51
2) N 하르트만,『미학』,전원배역, 을유문화사, p.285
3) 조요한, 『예술철학』,미술문화, 2003,p.47
4) 자끄 엘륄,하태환역,『무의미의 제국』, 대장간, 2013
5) Joachim Bauer,Warum Ich Fuhle was Fuhlst, 이미옥역, 『공감의 심리학』,에코리브르, 2006, p.89 
6) Mikhail Bakhtin, Esetika slove Tvorchestra, 박종서 김희숙역, 『말의 미학』,길, 2006p.454
7) Jeremy Rifkin, The Empathic Civilization, p.185
8) Jeremy Rifkin, The Empathic Civilization, p.186
9) David Howe, Empathy, 이진경역,『공감의 힘』, 지식의 숲,2013,p.31
10) Antonio Damasio, Decart's Error:Emotion, Reason, and the Human Brain, New York:Quill, 2000, p.252 
11) 다음의 글은 졸고 “박수근, 하향성의 예술”(박수근 화백 탄생100주년기념 책자 『박수근 회화새로보기』, 예서원, 2014,pp.41-76)중 일부를 축약하였음.
12) 강신주, 『철학, 삶을 만나다』, 이학사, 2006, p.279
13) Henri J. M. Nouwn, A Spirituality of Caregiving, 윤종석역, 『돌봄의 영성』, 두란노서원, 2014, p.31
14) Roman Krznaric, Empathy, A Handbook for Revolution, pp.112-115
15) David Howe, Empathy, p.33 재인용